80년 6월중순경, 전주교구는 사제단 긴급회의를
열고 김현장씨(부산미문화원사건으로 구속수감)가
작성한「전두환 광주살육작전」이라는 유인물을
주일미사 때 신자들에게 배포 80년 5월 광주의
진상을 널리 홍보할 것을 결정했다.
테러 희생자 박창신 신부
이에 따라 박창신 신부는 본당과 공소에
유인물을 배포하게 되었는데, 행정구역상으로
충남 마전ㆍ신근리공소에서 교리교사들이
대전 계엄사령부의 연행, 조사를 받는 사건이 발생,
이때부터 박 신부는 군기관에 의해「요주의 인물」
로 지목받게 되었다.
박창신 신부가 테러를 당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5월 25일 금마공소
주일미사 강론.
박 신부는 공수부대(7공수여단. 80년 5월
광주로 출동했던 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금마지역에서 5.18에 직접 참가한
공수부대원들의 참회를 촉구 한면서
『공수부대원에게는 물건도 팔지 말고,
그들과 상종을 하지 말라』고 강조,
군인들의 비위를 상하게 했다.
당시 금마지역에 살고 있던 신자와 주민들
대다수가 박 신부의 서슴지 않은 강론에 대해
『이 무서운 세상에 저렇게 당당할 수가…』
라는 생각과 함께 박 신부의 신변을
매우 염려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달 후인 6월 25일 박 신부는 금마공소에서
봉헌한 밤 8시 30분 미사를 마치고
공소청년회원 임모세(당시26세)ㆍ
소수산나씨와 함께 밤 10시 30분경
여산성당 사제관에 도착,
현안문제에 대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사제관 2층 거실에서 얘기를 하던 중
현관 초인종이 울려지고, 임모세끼가 1층
현관문을 여는 순간 5명의 괴한이
쇠파이프 등으로 임씨를 내려쳤다
이와 함께 임씨의 비명소리를 듣고 뒤따라 나온
박 신부에게도 쇠파이프로 전신을 구타하고,
예리한 칼로 팔ㆍ다리 등을 찌른 후
『일단후퇴』라는 외침과 함께 테러범들은
도주했다.
이 테러사건으로 임씨는 가벼운 타박상에
그쳤으나, 박 신부는 늑골 골적, 전신타박상 및
자상(刺傷)으로 전북대부속병원에 입원,
3주간의 치료를 받아야했다.
그러나 이후 상처가 재발하면서 하반신이 마비,
81년 8월 22일부터 10월말까지 전북대병원ㆍ
서울 성바오로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박 신부는
오른쪽다리를 절룩거려야하는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이 사건발생 후 전주교구 사제단ㆍ
정의평화위원회ㆍ수녀연합회ㆍ
가톨릭농민회 등 교구단체와 본당에서
진상의 철저한 수사를 촉구했으나
합동수사반은 수사의 방향을
「치정에 의한 원한관계」로
몰고 가려는 듯한 인상을 진하게 풍겼다.


댓글 3
흉기로 난자 수법이 비슷하네
총칼로 국민들의 입과 눈을 가리고 차지한 권력 1000년 10000년 갈 줄 알았냐
쇠파이프와 흉기로 신부님을 난자.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었구나.
쇠파이프와 흉기로 신부님을 난자.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었구나.
총칼로 국민들의 입과 눈을 가리고 차지한 권력 1000년 10000년 갈 줄 알았냐
흉기로 난자 수법이 비슷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