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자들만 안다에 대하여.
"(법화경) 사리불아, 모든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법은 그 뜻이 이해하기 어려우니라. 왜냐하면 내가 무수한 방편과 가지가지 인연과 비유와 이야기로 법을 연설하지만, 이 법은 생각이나 분별로는 능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니, 오직 부처님들만이 아시느니라. 부처님 세존들께서는 다만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93)으로 이 세상에 출현하시기 때문이니라.
사리불아, 어찌하여 부처님 세존들께서는 다만 일대사인연으로써 이 세상에 출현하신다고 말하느냐? 부처님 세존들께서는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님의 지견(知見)94)을 열어[開] 청정케 하려고 세상에 출현하시며, 중생에게 부처님의 지견을 보이려는[示] 연고로 세상에 출현하시며,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님의 지견을 깨닫게 하려는[悟] 연고로 세상에 출현하시며,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님의 지견의 도에 들게 하려는[入] 연고로 세상에 출현하시느니라.
사리불아, 이것을 부처님들께서 일대사인연 때문에 세상에 출현하시는 것이라 하느니라."
위 간단한 문장으로 알 수 있는 여러가지 사실.
1. 부처님은 한 명이 아니라는 사실.
2. 열반 속에 있는 부처님도 하화중생하여 세상에 몸을 받고 나온다는 사실.
3. 일대사인연 이라는 인연짓기를 위해 온다는 사실.
4. 아는 자들만 알게 된다는 사실.
원래 "아는 자들만 알게 된다"는 내용을 가지고 글을 한편 올리려고 했는데 굳이 다 설명할 필요 없이 이렇게 설명이 된 법화경의 글로 대신합니다. 다만 몇가지 실마리를 말해 본다면,
자신의 세계에서 생각되지 못한 일은 또 경험이 없으면 아에 없는(無) 것입니다.
그릇속이 비어 있다는 沖(빌 충), 空(빌 공)의 개념은 실제로 아무것도
없을 수 없음을 아는 자들만 알게 될 뿐이며, 또한 숫자 " 0 " 의 개념 또한 이해할 수 없었던 시대의 무지에서는 알 수 없습니다.
자신의 이해 세계의 한계에서 새롭게 무엇인가를 알았다면 이것은 그 자신에서의 창조, 자신에서의 일체유심조 입니다.
비록 그 자신에서의 일체유심조가 이미 다른 존재나 신들에게는 기초적
개념에 지나지 않을 지라도 새롭게 알게 된 사실 자체가 무지한 자에게는 새로운 깨달음이며 창조입니다.
이러한 지경을 넓히어 가는 과정이 자신의 공부입니다. 그릇 작음을 탓하지 말되 그릇 작음과 상관 없이 무한하게 앞설 수 있는 것도 이 공부입니다. 그점을 잘 생각하고 헤아려 판단하기 바랍니다.
2012/04/13 23:4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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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
"대승불교 비판은 곧 석가의 원류에 접근하는 방법이라는 착각에서 먼저 해방되어야 할 것입니다. 불교비판은 석가의 말이냐 아니냐가 기준이 아니라, 불교적이냐 아니냐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봅니다.(인용문)"
"마음 밖에 따로이 구할 것이 없다"(현 조계종 종정 법전스님)
유전: (불립문자 이기 때문에)달을 가르키면 달을 보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을 본다는 비판성 글을 새롭게 보면
달 또한 석존의 본 마음이 아니라 비유이므로 석존의 설한 근본적 이유,
즉 석존의 마음을 보아야(견성성불) 부처가 됩니다. 불경이라는 경전 또한 석존의 깨달음
진리를 설명한 아주 단편적인 이야기(교외별전)에 불과하니 석존의 마음을 한번에 보아 (직지인심)
(교외별전,직지인심, 견성성불,불립문자 - 이 짧은 덧글로 이 네가지를 다 설명 했음)
스스로 석존의 깨달음을 공유하게 되면 그것이 곧 부처입니다.
(자신의 내면에 있는 부처에게 귀의하여 스스로의 불을 밝히는 것이 자등명)
2009/04/10 11:25:07
유전
소승 대승과 달리 일불승에 가게 되면 위계에 대하여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즉, 마음 밖에 따로이 구하지 않게 되면 누가 높고 누가 낮은지 보다
자신의 공부가 어디인가를 스스로 성찰할 뿐이며 오히려 (다른 누군가에게서라도) 새로운 진리가
나오게 됨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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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 석존의 마음을 바로 본다(직지인심) 라고 했는데 석존의 마음은 무엇인가? 자비심이다. 그런데 불경에는 자비심에 대한 설법은 별로 없고 소승 대승 공사상 계율 등에 관한 설법이 많은데 석존의 출가지심 즉 출가를 하게 된 동기를 보면 생로병사에 의한 인간의 고통을 보고 그 불쌍한 마음에 더하여 자기애적인 고통의 해결방안 모색이 바로 출가지심이다. 이 자비심은 사랑과 다른데, 불교의 자비심은 중생에 대한 어머니의 마음으로 비유될 수 있고, 예수의 사랑은 중생에 대한 아버지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비슷하면서도 그 방편은 완전히 다르다 할 수 있는데 말과 글로 세세하고 자상하게 설명하는 것이 불교라면 예수는 말 없이 결과적 행동으로만 직접 시범을 보이거나 모두를 살리고자 희생을 하는 것이 아버지의 마음이다. 2012.01.28 11:02
유전: 석존의 독생자 라훌라는 석존의 깨달음 이후로 제자가 되면서 비구행을 하는데 라훌라 라는 이름 자체는 "장애"를 뜻한다. 나중에는 밀행제일존자 라고 불리는데 이것은 신약의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한다" 라는 방식과 같다. 어머니의 자비심적 입장에서 보면 아버지의 사랑은 어떻게 보면 장애이면서 자식들이 그 사랑을 오해하여 오히려 자신을 억압하고 미워하여 아버지를 마왕에 비유하게 될 정도로 냉엄하고 때로는 호된 꾸지람이나 사랑의 매를 치는 방식도 포함된다. 불교의 자비심이 이타적 희생을 근본으로 한다면 예수의 사랑은 자기애적인 이기적 애착을 근본으로 한다는 설명이 조금 더 이해가 쉽겠다. 자신의 사랑이 소중한 만큼 그 소중한 것을 깨닫게 되면 타인의 사랑 또한 존중하게 되고 그것이 이웃사랑이다. 2012.01.28 11:28
유전: 이 우주에는 모든 지적 존재들이 따르게 되는 법(法)이 있어. 그 법이 바로 불교의 법, 즉 불법이다. 불법에서 가장 기초가 인과율이거든. 원인과 결과에 따른 법칙이지. 먼저 악업을 짓는 자는 꼭 그에 상응하는 댓가를 치르게 되는데 불교의 인과율에 따르면 깨달은 자에게 욕을 하거나 비방을 하게 되면 더욱 큰 죄업에 빠지는 것이라고 설명을 하지. 이것을 비유로 설명하면 대가족이 있는 집안에서 어린 놈 하나가 할아버지에게 욕을 한 경우와 비슷해. 형제들 끼리 놀다가 싸우면서 욕을 하는 경우와는 완전히 다르지. 그 댓가를 치르게 하는 방식은 부처들이 행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정해져 있는 시스템과 같은 거야. 매트릭스 시스템이지. 선업이 많으면 고통을 줄이는 원력이 따라 올 수는 있지만 댓가 자체는 무조건이다. 2012.01.28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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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044:유전 뭐하시는 분이죠? 2012-01-27 16:17:14
유전: 예수의 1대 아버지는 석존(독생자 라훌라가 예수). 2대 아버지는 정반왕(석존 당시 석존의 아버지. 죽기전에 아라한과를 증득하고 타계한 이후 그 후생으로 노자(도덕경의 저자)가 됨. 아미타불임과 동시에 다른 이름으로 무량수불). 예수는 현재 한국에 다시 태어나 있는 상태로 각성하기 이전에 정리할 모든 것들은 내가 정리한 후, 예수는 지구의 지하와 수계 즉 바닷속 그리고 외계 존재들을 상대하게 될 것임. 2012.01.27 16:59
(화엄경) "선남자여, 그 때의 그 일체법사자후원개묘음왕(一切法師子吼圓蓋妙音王)이 어찌 다른 사람이겠느냐. 지금의 저 노사나(盧舍那) 여래·응공·등정각이 바로 그 사람이요, 그 정광왕(淨光王)은 지금의 저 정반왕이며, 그 연화광(蓮華光) 부인은 지금의 저 마야(摩耶) 부인이요 그 때 그 나라 인민들은 지금의 이 대중들이니, 이들은 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 물러나지 않게 되어, 혹은 초지(初地) 내지 십지에 머물면서, 큰 원을 성취하여 모든 법문에 머무르고 방편의 도를 닦아 일체지를 구하여 모든 해탈에 머무느니라.” (이 대목의 노사나불은 정반왕이 연못의 연꽃에서 아기를 태어나게 하여 커서 일체법사자후원개묘음왕이 되고 다시 노사나불이 되었는데 정반왕의 분신이라고 보아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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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 :금강경은 유명한 경전이다. 짧아서 30분 정도면 다 읽을 수 있지. 그 중의 한 대목 //「걱정하지마라. 여래가 이 세상을 떠난 뒤 5백세가 지나가도 계를 지니고 복을 닦는 자만 있으면 능히 믿는 마음을 일으키고 그것을 진실이라고 여기게 될 것이다. 그대는 이 사람이 한 부처님이나 몇 분 부처님에게만 귀의하고 선근을 심은 것이 아니라,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부처님 밑에서 갖가지 선근을 심었기 때문에 이 경전을 듣고 보거나 잠깐 생각만해도 청정한 믿음을 일으킨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불기는 석존의 입멸 즉 열반으로 기준을 잡는다. 불기 정확히 500년 후가 서기 즉 예수의 탄생시기이다. 그리고 이러한 예언은 불경 곳곳에 있다. 예수는 지장(지옥)보살이자 미륵보살인데 지장불 미륵불로도 불린다. 2012.02.04 02:56
유전: 도덕경은 3장씩 9개 = 27장 , 그리고 27장이 다시 3개로 총 81장(9*9=81)이며, 수 많은 수리법칙이 있는데 그 중의 대표적인 것을 하나 설명하면, 도덕경은 총 5,001 글자로 되어 있고 덕경의 총 글자수 2,683 에서 도경의 총 글자수 2,318 을 빼면 1년을 나타내는 365 라는 숫자가 나온다. 도덕경에서 가장 중요한 장은 42장인데 도덕경 전체 글자수 5,001 에서 아버지를 뜻하는 父 는 이 42장에 딱 한번 나온다.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나니.....중략...사람들이 가르치는 바를 나 역시 가르치려고 하나니, 강하고 뻣뻣한 사람은 편한 죽음을 얻지 못하게 될 것이니, 나는 이것을 장차 아버지의 가르침에서 으뜸으로 삼을 것이다. 2012.02.04 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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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4.07)
(도덕경 42장 제타위키 번역)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모든 것을 낳는다.
만물은 음을 지고 양을 껴안으며,
상승하는 기운으로 조화를 이룬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은 외로움, 부덕함, 착하지 못함이라,
지배자는 스스로를 그렇게 낮춰부른다.
그래서 어떤 것은 덜어도 더해지고,
반대로 더해도 덜어지거나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가르치는 것을, 나 역시 가르치는데,
억센 자는 곱게 죽지 못한다. (유전: 고집을 부리는 자는 편한 죽음을 맞을 수 없음)
나는 이를 금과옥조로 삼으려 한다.
(도덕경 6장 제타위키 번역)
골짜기의 신은 죽지 않으니 이를 가리켜 알수없는 암컷이라 한다.
알수없는 암컷의 문은 말하자면 하늘과 땅의 뿌리이다.
있는듯 없는듯 이어지나, 아무리 써도 마르지 않는다.
위 첫 절에서 "골짜기의 신은 죽지 않으니"에 해당되는 원문은 곡신불사(谷神不死)로 매우 유명한 구절로, 다음 구절이 "알 수 없는 암컷"이라고 되어 있는데 불경에서 비로자나불을 제외하고 다른 부처님들은 모두 수명이 있지만 아미타불의 48대 서원과 그 서원을 모든 부처님들이 승인한 것으로 아미타불의 다른 이름인 무량수불(목숨의 양이 끝이 없는 부처라는 뜻)로 불리게 됨.
위 화엄경 인용문에서 정반왕이 자신의 분신을 내어 키운 후 노사나불이 되게 한 경우와 같이 다시 노사나불이 비로자나불의 태장계(화엄계, 금강계)에서 나와 법장비구로 있으면서 48대 서원대로 단번에(불가사의한 시간을 거쳐) 독립된 서방정토 극락 불국토를 장엄하였다고 보아야 하며 도덕경의 "알 수 없는 암컷"은 비로자나불의 태장계에서 아이밸 태胎, 그리고 자비에서 자慈(사랑 자, 어머니가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모습) 비悲(슬플 비. 어머니의 젖이 없는 모습))와 같이 그리고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보살행이 어머니의 마음과 같다는 점은 도덕경의 "알 수 없는 암컷"이 비로자나불을 뜻한다고 보아야 함.
화엄경에 처음 등장하는 노사나불이 범망경에서 "1천의 연꽃 위에 있는 부처는 모두가 곧 나의 화신(化身)이며, 천백억의 석가모니는 곧 1천 석가모니의 화신이며, 나는 그 본원(本原)이 되니, 이름하여 노사나라 하느니라."라고 설법한 것과 같이 다시, 노사나불의 본원을 화엄경에서 비로자나불 이라 설법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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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3.08)
[유전] [오후 2:33]
(지장보살본원경) 지장보살이 성모(마야부인)께 말씀하시기를,
“성모시여, 무간지옥을 대략 설명하면 이와 같으나, 만일 널리 지옥에 죄받는 기구 등의 이름이나 모든 괴로운 일을 상세히 말하자면 한 겁 동안이라도 다 말하지 못합니다.”
마야부인이 이 말을 듣고 나서 근심이 생겨 합장 정례하고 물러갔다.
4. 염부중생업감품(염부제 중생들이 받는 업보)
이때 지장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말씀하셨다.
“세존이시여, 제가 부처님의 위신력을 입었으므로 백천만억 세계에 두루 이 몸을 나투어서 일체 업보 중생을 제도하니, 만일 부처님의 큰 자비력이 아니시면 능히 이와 같은 변화를 짓지 못할 것입니다. 제가 이제 또 부처님의 부촉하심을 받아, 아일다(미륵) 께서 성불하기까지 육도중생이 해탈케 하오리니 오직 원하옵건대 부처님은 조금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유전] [오후 2:34] 그때 부처님께서 지장보살에게 이르시기를,
“일체중생이 해탈하지 못하는 것은 성품이 결정됨이 없어 악한 습관으로 업을 짓고 착한 습관으로 과를 맺기도 하기 때문이다. 착하고 악한 데에 경계를 따라 오도에 윤회하되 잠시라도 쉴새가 없으며, 많은 겁을 지나도록 미혹하고 장애와 액난을 받으니, 이는 마치 고기가 그물 안에 놀면서 흐르는 물속에 있는 줄 알아 벗어났다가 들어가고 잠시 나왔다가 또다시 그물에 걸리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무리들을 내가 근심하고 염려하였는데, 그대가 이미 예로부터 세웠던 원력을 여러 겁을 두고 거듭 세워 이들 죄지은 중생 무리를 제도하리라 하니, 내가 다시 무엇을 염려하겠는가.”
[유전] [오후 2:36] 성품이 대자대비심으로 ("부처님의 큰 자비력이 아니시면- 위 지장보살의 멘트") 완전히 결정되지 않은 중생은 저렇게 그물에 걸린 물고기와 같이 윤회하게 되는거죠.
[유전] [오후 2:38] 저 말을 정리해 보면 윤회하고 싶지 않다고 윤회를 안하는 것이 아니라 "견성성불" 즉 대자대비심 이라는 성품을 보고 결정을 내린 자가 부처를 이룬다와 같이, 오직 성불을 해야만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죠.
[유전] [오후 2:44] (무량수경) 이 천지 사이에는 지옥과 아귀와 축생과 인간, 천상 등의 5도(五道)로 굴러다니는 생사윤회의 도리가 분명하며, 그 법칙은 참으로 넓고 깊고 미묘하느니라. 그래서, 선과 악을 지으면 그 과보로 복과 재앙을 자연히 받게 마련이며, 자신이 지은 업보는 자기 스스로 이를 받고 아무도 대신할 수 없음은 엄연한 인과의 도리이니라. 그러므로, 오직 그가 저지른 소행에 따라서 그 죄벌이 목숨을 좇아 따라다니며 떠나지 않느니라.
착한 사람은 선을 닦아서 안락한 처소에서 한결 더 안락한 처소로 나아가고 그 지혜는 더욱 밝아지며, 또한 악한 사람은 악을 범하고 괴로운 처소에서 더욱 더 괴로운 처소로 들어가며 그 마음은 보다 심하게 어두워지게 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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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 2026.04.07 15:06:37 “(지장보살본원경) 일체중생이 해탈하지 못하는 것은 성품이 결정됨이 없어 악한 습관으로 업을 짓고 착한 습관으로 과를 맺기도 하기 때문이다. 착하고 악한 데에 경계를 따라 오도에 윤회하되 잠시라도 쉴새가 없으며, 많은 겁을 지나도록 미혹하고 장애와 액난을 받으니, 이는 마치 고기가 그물 안에 놀면서 흐르는 물속에 있는 줄 알아 벗어났다가 들어가고 잠시 나왔다가 또다시 그물에 걸리는 것과 같다." "(무량수경) 착한 사람은 선을 닦아서 안락한 처소에서 한결 더 안락한 처소로 나아가고 그 지혜는 더욱 밝아지며, 또한 악한 사람은 악을 범하고 괴로운 처소에서 더욱 더 괴로운 처소로 들어가며 그 마음은 보다 심하게 어두워지게 되느니라." 유전 2026.04.07 15:19:06 요즘 불교 입문자들이 많아지면서 10년도 안된 공부로 마치 금강경의 설법대로 "금강경 네 구절만 들어도 깨닫게 된다"와 같은 행태를 보이는 자들이 무수히 많이 생겨나면서 각종 게시판과 톡에서의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음. 이들의 특성은 대부분 불,법,승 삼보에서 법에 해당되는 불경을 근거로 하지 않고 또 근거를 제시한다고 해도 어느 구절 하나에만 꽂혀서 그것이 불교의 전부인양 오도하고 있음. 나(유전)의 경우에는 마왕의 시험을 40일간 겪고 이겨낸 후 깨달은 것에 대해 계속 블로그에 연재해 왔는데 내가 깨달은 것은 불교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종교에 해당되어 일부러 불교만의 경전인 불경 읽기를 멀리했음. 그러나 차츰 인터넷 상에서 어쩔 수 없이 접하게 되는 소승은 물론 대승경전 전체에 어긋남이 없었음. 유전 2026.04.07 15:29:08 그 이후로 내가 수 없이 말해 왔지만 자신의 앎이, 깨달은 고승들이 공통으로 인가한 어느 해당 경전 내용과 어긋남이 있으면 그것은 깨달은 것이 아님. 그럴 때는 그 경전에서의 내용이 왜 자신의 앎과 다른지 또 석가모니 부처님은 왜 그러한 설법을 했는지를 해결될 때까지 다른 경전과 맞춰가며 궁구해야 함. 그렇지 않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라며 해당 경전을 비방하거나 아예 대승경전 전체를 비방하는 일은 그저 무지랭이 중생의 업보가 많아서 상승 경전을 이해할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끝까지 고집을 피우며 자신의 말만을 내세우게 되는데 한 마디로 타화자재천 마구니가 알게 모르게 전해 준 앎을 자신의 생각이거나 깨달음인 줄 착각하는 것임. 이런 자들은 또 각종 신기한 영적 신적 체험들을 불교의 가피력이라며 우김. 유전 2026.04.07 15:46:05 그러한 신통방통한 영적 신적 체험이 소승 단계에서는 필요하지만 대승 단계만 넘어가도 공사상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에 그런 체험 자체도 공(空)해야 함을 가르친 것이며 대표적인 경전이 금강경과 반야심경인데 이 두 경전은 "(금강경) 그러므로 여래는 대승(보살승)의 마음을 낸 사람을 위하여 이 경을 설명하며, 최상승(마하살승, 마하살품 참조)의 마음을 낸 사람을 위해 이 경을 설하는 것이니" 와 같이 공사상의 입문서 정도로 보아야 하며 그 입문서 이후의 설법에 해당되는 경전으로 가면 난이도가 높아 대부분 이해못할 설법이 많음. 대승 경전에서는 소승의 두 축인 2승 즉 성문승(마음의 소리를 듣는 단계), 연각승(=독각승, 벽지불. 소승적 연기법에 눈을 뜬 단계)을 공사상으로 경전 곳곳에 비판하였음. 유전 2026.04.07 16:18:46 위에 올린 지장보살본원경과 무량수경 인용구절을 대입하여 최근 가장 많은 논란이 일어나고 있는 2가지 논쟁에 대하여 답해 보겠음. 첫째는 자유의지가 있느냐 없느냐인데 "(능가경) 또, 대혜야, 일곱 가지 성자성(性自性)이 있다. 말하자면 집성자성(集性自性)ㆍ성자성(性自性)ㆍ상성자성(相性自性)ㆍ대종성자성(大種性自性)ㆍ인성자성(因性自性)ㆍ연성자성(緣性自性)ㆍ성성자성(成性自性)이다." 이 일곱가지 자성 전체를 자유의지로 보면 됨. 따라서 부처님 설법에 따라 자성 즉 자유의지는 있음. 불교인을 자처하면서 자유의지가 없다고 하는 자는 여섯가지 외도 즉 육사외도에 해당되는 것임. 단멸론에 숙명론자는 불교가 아님. 다만, 고개만 돌리면 피안인데 위 지장경 "악한 습관으로 업을 짓고 악한 경계를 따라 오도"하는 고집을 부림 유전 2026.04.07 16:27:33 둘째는 윤회논쟁인데, 위 "(무량수경) 착한 사람은 선을 닦아서 안락한 처소에서 한결 더 안락한 처소로 나아가고 그 지혜는 더욱 밝아지며, 또한 악한 사람은 악을 범하고 괴로운 처소에서 더욱 더 괴로운 처소로 들어가며 그 마음은 보다 심하게 어두워지게 되느니라." 내용과 같이 소승의 낮은 경계가 아닌 대승인 보살승의 경계로 상승하면 지혜가 생기고 점차 걸림이 적은 선과 공덕을 쌓게 되는 것임. 악업이 점차 사라지고 선업과 공덕만 남되 그러한 선업과 공덕도 공(空)하게 되는 경지가 부처의 경지이지만 그러한 은혜를 받은 중생은 자신이 상승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은혜를 갚아야 하는 업이 있고 이 은혜를 부처님께 갚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이 행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중생에게 갚아야 함. 그렇게 갚는 체험이 보살행임 유전 2026.04.07 16:57:53 윤회논쟁을 위 답변에 대입하면, "착한 사람은 안락한 처소에서 한결 더 안락한 처소로 나아가고"와 같이 죽더라도 자신의 본래법신(영靈)은 있어서 점차 안락한 처소 즉 불교의 28개 천국에 태어나게 되는 것임. 무지성 중생은 모든 행위에 있어 늘 과거의 악업 때문에 그 악업에 해당되는 마구니들이 장난을 치기 때문에 '나(我 아)'라고 할만한 것이 없는 무아, 비아에 해당되지만 보살이 되면 부처님 법에 의지하여 고개만 돌리면 피안이 되어 중생의 고집을 꺾고 점차 상승하게 되는데 이러한 무아사상 외에 무상(항상됨이 없이 변화한다)사상을 합쳐 영속하는 자아도 윤회도 없다고 고집을 부리는 자들이 많음. 없다고 하는 자체가 이미 외도인 단멸론자이며 10년 전의 자신과 현재의 모습이 다르다고 자신이 아니라는 것과 같음.
개독과 다른게 머냐?
구약은 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