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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5월 푸른눈의 목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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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를 모두 들었다.

너무 슬퍼 눈물을 흘리면서도 나는 기록했다. 

한국 언론에서 거짓을 말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진실이 얼마나 위험한지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내 필름에 기록된 모든 것은 내 눈앞에서 

일어났던 일. 피할 수 없는 진실이기 때문이다.

 

우리 독일인이 제2차 세계 대전 때 했던 만행을 

기억하는 만큼, 5.18도 반드시 기억되어야 한다.

 

독일의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 


학창시절에는 의사를 지망하던 의학도였으나 

미디어로 진로를 바꿔 1963년에 당시 서독의 

ARD 소속 방송국인 북부독일방송의 텔레비전 

카메라맨으로 입사했다. 

 

1967년 초에는 그 당시 ARD의 유일의 동아시아 

방면 지부가 있던 홍콩으로 발령을 받았으며 

1969년 봄에는 베트남 전쟁에 종군기자로 

취재하다가 사이공에서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이후 일본의 도쿄 지국으로 옮겨가 1973년부터 

1989년까지 17년간 특파원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독일의 파울 슈나이스 목사의 소개로 

1974년 9월 26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출범을 취재하기 위하여 처음 한국을 방문하였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몇 차례 대한민국을 방문하여 

박정희 정권하의 여러 공안 사건들에 대한 

기록과 5.18 광주민주화운동 직전 

가택 연금 중이었던 김영삼과의 인터뷰를 

녹화하는 등 다양한 취재를 했다.

 


5.18 민주화운동이 진행 중이던 1980년 5월 20일 

독일 제1공영방송(ARD) 북부독일방송 특파원으로

광주시에 잠입했다. 

 

5월 19일 오전, 힌츠페터는 일본 언론 보도를 

듣던 중 '계엄령하의 광주에서 시민과 

계엄군 충돌'이라는 짤막한 소식을  듣게 된다.

 

힌츠페터는 그 전날 한국군 계엄사령부의 

계엄령 선포 등 여러 가지 정황을 봤을 때 

평범한 사건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한국에 여러 번 전화를 걸어보았으나

제대로 연결이 되지 않자 의심은 확신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에 힌츠페터는 2시간만에 짐을 싸서 

같은 방송국의 녹음 담당 기자인 헤닝 루모어

(Henning Rumohr)와 함께 5월 19일 오후 

직접 서울로 향했다. 

 

이는 21일이 되어서야 광주로 향한 대부분의 

외신 기자들보다 훨씬 빠른 것이었다.


당시의 외국 기자들은 한국에서 취재하려면 

국가홍보원에 신고해야 했지만, 

그는 광주 취재 허가를 받는 것이 불가능하리라 

예상했기에, 아예 신고를 하지 않고 

몰래 잠입한다. 

 

서울에 도착한 힌츠페터와 루모어는 조선호텔에 

숙박하고, 5월 20일 오전 외국인 전용 호텔택시 

기사 김사복과 함께 당시 최고급 세단이었던 

검은색 새한 레코드 로얄 택시를 타고

광주로 내려갔다. 

 

김사복은 호텔택시 회사를 운영하는 

사장이었지만 힌츠페터를 직접 안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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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츠페터와  김사복


광주로 가는 중, 광주로 통하는 도로를 달리는 차가 

자신들 말고 단 1대도 없다는 것을 보고 불길함을 

느껴 그 휑한 도로를 촬영해두기도 했다.

 

광주로 통하는길목의 검문소에서 군인들에게 

제지당하자

 

힌츠페터 일행은 5~10km를 우회하여 작은 마을과 

젊은이들을 만나게 되었고, 힌츠페터는 청년들이 탄 

트럭에 올라타고 시내로 들어간다.


그 결과 광주의 참상이 그의 컬러 필름에 고스란히 

담겨 현재까지 보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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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츠페터는 종군기자로 활동한 적도 있었지만 

5.18 광주민주화운동 정도로 비참한 광경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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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 현장과 병원을 찾아다니며 비디오로 찍으면서, 

그는 가슴이 꽉 막히고 흐르는 눈물 때문에 

촬영을 가끔씩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슬픈데도 촬영을 하는 자신을 혐오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자료를 모아야 하니까 슬픔과 참담하고 

압도당하는 느낌을 뒤로하고 계속 찍을 수밖에 

없었다. 


슬퍼하기만 했다면 자료를 많이 모으지 못했을 

것이라고 그는 훗날 말했다.

 

한편 광주시민들은 계엄군의 삼엄한 봉쇄망의 

빈틈을 뚫고 들어온 외신 기자를 열렬히 환영했다.


힌츠페터뿐만이 아니라 외신 기자들은 모두 다

큰 환대를 받았다. 

 

한국 기자들은 출입이 금지된 전남도청으로

 (시민군 상황실로 쓰였다.) 외신 기자들은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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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광주에 체류하고 있었던 외국인들인 

엠네스티 인터내셔널, 평화봉사단 직원들을 만나 

사태 초기의 상황에 대해 전해듣게 된다. 

 

이때 힌츠페터가 만난 이들은 팀 원버그, 

폴 코트라이트, 쥬디 챔벌레인, 데이비드 돌린저

등이다. 이때 건물 옥상에서 이들과 함께 찍힌 

사진이 유명하다.


또 그 다음날 새벽 4시경, 그는 멀리서 총성이 

들려오자 재빨리 카메라를 켜고 소리를 담기도

했다. 

아침이 되어 총에 맞아 숨진 두 사람의 시신을 

보고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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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츠페터와 루모어는 만 하루 동안 취재를 한 후 

21일 오후 광주를 빠져나왔다. 

이때 검문을 피하기 위해 1등석에 탑승했으며, 

공항에서의 필름 압수를 피하기 위해 일부는 

허리띠에 넣어 몸에서 떼어놓지 않게 숨겼다. 

 

그리고 일부는 당시 서울신라호텔에서 팔던 

로열 단스크(Royal Dansk)사의 파란색 버터 

쿠키 통 속에 숨겼다.

 

22일 오전 힌츠페터만 혼자 광주에서 서울을

경유해 나리타 국제공항으로 갔고, 필름은 도쿄 

나리타 국제공항에서 곧장 모국인 독일로 보내졌다. 

 

나리타 국제공항에서 필름을 넘겨주고 곧장 돌아온 

힌츠페터는, 23일 계엄군이 일시 퇴각한 상태의 

광주로 또 잠입하면서 시민 자치하의 광주의 

모습을 추가로 촬영했다. 

 

이번에는 김제에서 택시를 타고 갔으며, 

외국 회사 주재원으로 위장하고

 "광주에 남아 있는 회사 부장을 빼오겠다"면서

군인들을 속여서 광주로 진입할 수 있었다. 

 

고급 차량과 외국인 두 명 그리고 

호텔 택시기사였기 때문에 속일 수 있었다.


이 필름은 도청 앞 분수대에서의 규탄 대회

(힌츠페터는 이 장면이 인상깊었다고 한다.) 등을 

제외하면 생각보다 평온했던 시민들의 일상을

담았고, 힌츠페터가 될 수 있는 대로 모은 

광주 상황을 보도한 외국 신문이 대자보처럼 

붙여지고 관심을 갖고 이 앞에 모여든 시민들의 

모습이나 약탈이나 물자 부족 같은 것 없이 

음식이 가득한 시장 상황

 

계엄군 측과 협상하기 위해 애쓰는 수습위원회 

위원들 등을 담고 있다. 

 

당시 계엄군 측이 언론에 흘린 '폭도가 점령해 

아비규환이 된 시내' 같은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확실한 증거였다. 

 

힌츠페터 본인도 당시 광주 상황이 안전했음을 

보여주고 싶어서 촬영한 장면이다.


힌츠페터는 두 번째 취재 자료를 독일로 보낸 후 

5월 27일 세 번째로 광주에 들어갔으나, 

그때는 이미 계엄군의 강제 진압이 이루어져

모든 것이 끝난 뒤였다. 


힌츠페터의 취재와 영상자료는 

5.18 민주화운동을 폭동으로 날조하려는 시도를 

저지하고 오늘날의 평가를 정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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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

쌀바다

영화에서는 광주에 들어가셨다가 취재를 마치신 후 필름을 가지고 일본으로 떠나시는 장면만 나오는데 실제로는 광주에 3차례나 들어가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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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바다

민주화 항쟁 기간동안 광주를 2차례나 취재하시고 기록을 남겨 주셨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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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바다

이런 분이 진정한 언론인 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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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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