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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107주년 숨겨진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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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일본유학생들이 2월8일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만세 운동 시작

1919년 3월 1일 서울 종로 탑골공원에서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며 시작된게 기미년 3월 1일 정오 3.1 만세운동 본격적 시작이다.

여기까지는 교과서에 다 나온다.


유관순 누이는 이화학당 고등과 1학년 16살이었다.

시위대에 섞여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훈방으로

곧 석방되고 고향 충청도 병천으로 내려가 만세운동 준비 단체에 합류한다.

지방에서 가장 빠른 만세운동은 대구에서 3월 8일 그리고 광주가 3월 10일이다.

유관순의 천안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은 무려 4월 1일이었다.

지금처럼 인터넷 시대도 아니고 서울 소식이 지방에 전해지고

준비 과정 생각하면 당연한거다.


유관순 누이는 사실 늦게 합류하여 아우내장터 만세운동 핵심은 아니었다.

그런데 왜 우리 누이가 만세운동의  상징이 되었을까?

역사는 기록이다.

1. 누이의 기록은 명확하게 남아있는데 정작 핵심 인물들의 기록은 사라졌다.

2. 누이가 수감되고 서울 서대문 형무소로 이송까지 되며 만세운동 이후

  행적이 너무나 분명하고 불굴의 의지로 일본 왜경들을 겁나게 했기 때문이다.

3. 1920년 9월 28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사한다.

  고문 후유증이라 하지만  ..즉, 장살이라고 맞아 죽은거라 는게 타당하다.

  이화학당 교장은 시신 인도를 요구하지만 일본 왜경은 한동안 인도를 거부한다.


그리고 우리가 모르는게 당시 만세운동은 민주화와 민주공화국을 원했던게 아니다.

조선과 대한제국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왕정 복구를 꿈꾸던

세력이 주축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름조차 남겨지지 않은 수많은 순국자들과 주동자와 참가자들을 찾아야 하지만

기록이 거의 사라져서 무작정 무명으로 기릴수 밖에 없는 상황이 부끄러울 뿐이다.

 

3.1운동 독립선언서 민족대표 33인중 3명이 변절했다.

1. 정춘수

  기독교 감리교 목사로 전향서를 쓰고 풀려났다.

  신사참배와 창씨개명에 앞장서고 교회를 헐어 전투기 제작비에 헌금했다.

2. 박희도

  친일 성향 잡지사를 창건하고 친일 활동을 하였다.

3. 최 린

  천도교 출신으로 독립선언서 초안을 작성했다.

  총독부 조선어판 매일신보 사장을 하며 친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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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노대중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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