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바이/자전거

우장춘 박사

10.jpg

 


"매국노 아버지 빚갚고 떳몇하게 조국에 묻힌 영웅"

1895년 10월8일 그날, 을미사변 조선 훈련대 제2대대장 우범선은 일본 낭인들을 인솔해 광화문을 열었고

명성황후 시해 후 시신 소각을 주도했다.
범행 직후, 일본으로 도망간 우범선은 1903년,자객 고영근이 휘두른 칼에 목을 찔리고 노윤명의 쇠망치에 머리를 가격당해 즉사했는데,

당시 현장에는 6살 아들 우장춘이 있었다.

아버지를 잃은 우장춘은 일본에서 빈곤과차별 속에 성장해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하고 '종의 합성'을 증명해 다윈의 진화론을 수정하는 세계적 석학이 되었다.

1916년경 조선 유학생 모임에서 연설하는 조선인 친일관료의 먹살을 잡고 호통치는 김철수(독립운동가)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고,그를 찾아가 자신의 아버지가 '우범선'임을 고백했고.

김철수는 "너의 연구(농업)로 조국에 속죄하라"는 조언을 들었고, 훗날 한국 귀국을 결단하는 계기가 되었다.

1950년 한국 정부의 요청을 받는 우장춘은 처자식을 일본에 남겨두고 일본의 방해를 피해 홀로 한국에 귀국했으나 그다지 환영받지는 못했다.

국회는 역적의 아들에게 예산을 쓰는 것에 반대했고,누군가는 그를 사기꾼이라 의심했고 일본으로 다시 도망갈지모른다며 정부 감시도받았다.

한국어를 전혀 못해 일본어만 쓰다보니 검문소 경찰에게'쪽X이'라며 뺨을 맞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변명 대신 결과로 답했다.

그는 100% 일본에 의존하던 배추와 무 종자를 비롯,귀국 5년 만에 채소 종자를 90% 이상 국산화해 자급을 이뤄냈다.

제주 감귤, 강원도 씨감자, 이모작 재배 기술 등 모두 우장춘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성과로 가난한 한국의 식량난 해결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1959년 8월 사망 3일 전 병상에서..

정부가 수여한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쥐고 "드디어 조국이 나를 인정했다"며 울먹였다고 한다.

그는 유언대로 자신의 연구소가 내려다 보이는 뒷산에 묻혔다. (수원 여기산)
매국노 아버지는 타국에서 피살되었으나,아들은 대한민국을 먹여살린 애국자로 조국에 묻혔다.

부산에도 우장춘박사님이 연구하셨던 곳이 아직남아 기념관으로 있고 그 옆을 지나는 길을 우장춘로로 명명하여 수많은 차량이 자나가고 있습니다.

특히 그곳에는 어머님이 돌아가셨는데도 출국을 허용치 않아 이를 안타깝게 여긴 국민들이 우박사님에게 조의금을 보냈습니다.

그 돈으로 제일 필요한 우물을 팟는데 아직도 기념관 한편에 남아있습니다.






40
본 게시물을 뉴스 및 기타 매체에서 인용하실 때는 '보배드림' 출처 표기를 부탁드립니다.

댓글 5

김연아사랑해

부산 온천동 식물원앞 도로에서 미남로타리..도로명이 우장춘로 이지요

1
만교아빠

우장춘로 우장춘 박사 이름만 알고 있었는데.. 이런 사연이 있었군요..

0
코코모리

민비를 시해한게 정말 매국이였을까요? 일본군을 끌고가서 매국이였을까요? 그들의 피에는 애족애민 이 이미 DNA자리 잡고있었다..

-4
방탕노년단

제주감귤...........씨없는수박만 알고있었는데 대단한 분이셨군요

0
부천짱아

명성황후 아니고 민비라 칭해야 할듯요

1

오토바이/자전거